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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과 결

Calvingo 2023. 2. 21. 23:32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는 성격과 다르게 올해들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고 안부를 물었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이제야 찾아온 건지
조금 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연락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연락한 것은 아니다. 친절한 아저씨 한 명, 어릴 적 친구 한 명, 도를 닦는 사람처럼 보이던 오빠 한 명.
인연을 맺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기준이 나도 모르게 형성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바로 격과 결.
나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이 두 가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사람에게는 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직업이나 경제적 상황이나 외모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격이라고 말하면 부잣집 사모님이 갤러리를 둘러보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평범한 직업을 가졌다고 격이 없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반응하며 살아가는지는 몇 번 대화를 하다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
가난해도 품격을 놓지 않고 자신을 남 앞에서 지나치게 낮추지 않는 것이 격이다.
멋진 직업을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격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멋진 외모를 질투하며 비하하는 것은 격이 없는 것이다.
강자라고 해서 약자를 혐오하는 것은 격이 없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상황을 탓하며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격이 없는 것이다.
오만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삶을 열정있게 이끌어 나갈 줄 알고, 더 나은 자신과 세상을 꿈꾸며 자신과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것. 읽다보면 나는 마치 격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오만한 소리처럼 들릴텐데, 오해는 말기를.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
가까워지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들 곁에 있어야 적어도 배우는 것이 있고 닮아간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들을 찾게 된다.
이러한 격은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척도만 마련하면 금방 상대를 파악하기 쉽다.

결은 격과 달리 주관적인 면을 반영한다.
결은 나와 비슷한 가치관, 감정선, 취향이다.
사실 무난한 성격이라면 결을 맞는 사람을 찾기가 쉽다.
그러나 자신이 좀 이상한 성격, 좋게 말하면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결을 맞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나는 지금은 무난한 성격이 되려고 많이 노력한 끝에 일종의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며 그럭저럭 주변인들과 잘 지내기는 하지만 여전히 친구라고 부르기는 찜찜한 관계다. 굳이 서로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결이 맞지 않아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다름에서 배우는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격이 없는 사람을 친구로 두는 것은 시간낭비다. 나는 피상적으로 많은 인맥을 만들바에는 차라리 고독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기하게도 결이 맞는 사람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거짓말처럼 딱딱 떨어진다.
매일 함께 놀던 옆집 동생이 미국에 이민을 가고 난 5년 후 그림을 정말 잘 그리던 친구를 만났고, 6년 후 전혀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도 좋다고 볼에 뽀뽀할 정도로 거리낌 없는 친구를 만났고, 7년 후 나를 정신적으로 이끌어주던 언니 한 명을 만났다. 그리고 그 후로 8년이 되는 2023년 올해, 내게는 어떤 진정한 친구가 생길지 궁금하다.
그러고보면 늘 사람들에게 왜 너는 먼저 연락하지 않냐고 서운한 소리를 듣는 내가 가장 거리낌 없이 다가갔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내 곁에 없다.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살아온 나를 받아줄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 있다고 쉽게 떠나보냈을까?
왜 인연이 중요한 줄을 모르고 자의식에 갇혀 내 잣대로 소중한 사람들을 판단했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렇게 그들을 떠나보냈는지 지금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그 당시로 가서 뺨을 조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들에게 무릎을 꿇어서라도 사죄하고 싶다.
그러나 연락처 조차도 그 놈의 욱하는 성질로 다 지워버려서 흔적조차 없다.

며칠 전, 카톡 선물하기 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받은 선물은 별로 없다.
원래 그렇게 살아서 그게 부끄러운 건지 씁쓸한건지 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헤어진 남자친구의 선물이 아직도 선물함 기록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ㅇㅇ야 보고싶어 라는 문구를 넣어 보낸 선물이었는데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런 걸 받아도 고마운 줄 몰랐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벤트처럼 무언가를 항상 가져오거나 준비해왔다.
나는 때묻지 않은 그의 순수함 때문에 좋아한 것이지만, 사랑하진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게 미안해서 나는 헤어졌다. 그게 첫 연애고 마지막 연애다.
솔직히 그 아이가 아니면 나는 한국에서 그런 남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닌데, 왜 그 아이는 나를 좋아해주었을까?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닌데 왜 그때 친구들은 나를 좋아해 주었을까?
그건 아마도 결일거다.
비슷한 걸 보고 감동하고, 비슷한 관점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고, 비슷한 것에서 멋짐을 느낄 수 있고, 비슷한 취향과 비슷한 가치관들.
떠나보낸 한 친구는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디자이너가 되었고, 한 친구는 방송작가가 된 것을 보았고, 한 언니는 어디선가 여전히 연극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고 꿈같은 이야기들만을 꿈꾸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게 우리의 결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들을 생각하며 독특한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것일까 독특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생각을 하다 결국에는 서로의 결이 우연히 맞았던 것이다. 라고 결론을 냈다.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는 것에 텔레파시처럼 함께 웃던 순간들, 나의 갑작스런 상황극에 마치 짜놓은 각본처럼 술술 이어지던 순간들,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어쩔 땐 동료로 어쩔 땐 라이벌로 지내던 순간들이 그립다.

만약 주변에 결이 맞는 격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소중한 인연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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