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발표가 있었다.
기획을 하면서 준비했던 것과 달리 발표 이후에 쏟아지는 질문들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똑똑한 척 하는 바보처럼 답한 것만 같아서 2차 심사는 떨어졌구나 생각했다.
실패해도 쉽게 이겨내야지 했던 다짐과는 달리 왠지 울적한 마음은 져버릴 수가 없었다.
녹차라떼 한 잔 마시면서 책이나 읽어야지 도서관에 앉아있는데, 문득 피부과를 가야한다는 기억이 나서 피부과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오늘은 기분 좋은 노래를 들으며 걷고 싶었다.
나름 내 기분에 맞는 선곡을 하고는 대학교 뒷골목길을 걸어 피부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학교 뒷골목길로 가면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풍경들이 보인다. 세련되지 않은 기사식당 같은 가게, 시대지난 인테리어의 카페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색바랜 간판의 미용실.
거리를 걷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사람들이 사랑스러워보인다.
손님이 없어 식탁 한구석에서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을 자는 아저씨의 모습이 식당 창밖으로 보인다.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럽다.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것도 아닌데 고개까지 뒤돌려가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발을 헛디딘 아주머니가 오늘은 이상하게 사랑스럽다.
신호등이 없는 거리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내게 먼저 가라고 손짓하는 트럭 아저씨 감사하고 사랑스럽다.
평소 같으면 촌스럽다고 생각했을만한 노란 탈색 머리의 여자를 보는데 그녀의 세계에서는 가장 멋진 머리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귀엽고 사랑스럽다.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사람들에게 맛있는 호떡을 파는 일인 털모자 쓴 할머니가 사랑스럽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시금치, 가지, 깻잎을 팔다가 점포를 정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
울적한 마음으로 시작한 한 걸음 걸음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왜 사랑스러워 보였을까?
내 마음이 변했을까?
그렇게 피부과에 도착하고나서 피부 관리를 받는데 공모전 결과가 발표됐다.
역시나 예상대로 탈락했다. 실망감이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과 사는 얘기를 하며 금세 잊었다.
피부과를 나와 털모자 쓴 할머니에게서 남아있는 호떡을 다 샀다. 먹고싶지는 않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할머니가 이제 정리하고 퇴근하려고 했는데 다 팔고 간다며 좋아하신다.
기뻐하는 할머니가 사랑스럽다.
할머니를 기쁘게 한 내가 사랑스럽다.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탈락했다고 말했다.
실패 축하를 하고 싶어서 어제 먹다남은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초만 꽂아 온 가족과 함께 '도전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초를 불었다. 축하 파티보다 더 값진 실패 파티였다.
오늘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너를 사랑하는 시선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실패와 부족함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을.
실패를 축하할 수 있는 여유를.
부족한 내가 사랑스럽다.
너의 세상을 사는 네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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