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라져가고 아름다움도 사라져가네

아이에게 줄 선물로 당신은 이젠 좋아하지 않는 곰인형을 고른다.
분홍색이라면 질색하던 남자가 진분홍의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거리 한복판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취향은 헤비메탈이라며 헤드폰 밖으로 새어나올 만큼 시끄러운 노래를 듣던 그가 결혼식에선 우아한 클래식이 연주되길 바란다.
그것은 받는 자의 취향이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론 우위를 가릴 수없는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들 중에서 사실은 높은 가치를 지닌 것들이기 때문이다.
외모지상주의와 내면의 아름다움.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은 점점 달라졌지만 사실 그 이면에도 '아름다움'이라는 걸 추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거니까.
표면적이든 관념적인 것이든 아름다움은 추함을 이긴다.
거대한 자연의 풍경 앞에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가슴 벅참을 느끼는 것도, 흘려들었던 노래 속에서 가사의 의미를 문득 느끼며 머리가 띵해진것도, 모르는 노인을 위해 밥을 먹여주던 한 패스트푸드점의 직원을 보며 눈물 흘리는 것도 그 기제는 모두가 같다.
결코 후천적으로 형성되었다 할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이상적인 비율의 이목구비를 지닌 사람을 더 오래 바라보는 아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은 결코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반대로 달려가고 있다.
아름다움과 가장 밀접하다 느껴지는 음악과 영화, 미술이란 영역에서 요즘 나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술이란 이제 혁신과 이전에 없던 것들,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충격을 줄만한 이질적인 것들을 펼쳐보이는 것들에 불과해보인다. 예술이 창의성에 대한 판단 뿐이었다면 지금을 이해할 순 있겠지만 예술에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조금이라도 포함하겠다면 글쎄.
대중은 이해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공감할 수 없는 찬사와 가치매김. 자신들만의 리그에서 이것이 예술이다 하며 대중들을 최대한 예술과 아름다움으로부터 배제시키려 한다. 애초에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력은 대중에게 없다.
대중도 자존심이 있으니 그들의 가치매김에 함께 가려한다.
그렇게 예술과 아름다움은 변질된다.
박수받으려면, 이 시대에 이 땅에 내 이름 좀 알리려면 따라가야 한다. 그 기준이 왜 있는지는 아직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냥 그렇게 걸어가는 거다. 내 선택인 것 같지만 결국 내 선택이 아닌거다.
세상은 점점 아름답지 않다. 이 추한 모습은 몇몇은 원하던 바다.
타고난 양심이 안다. 숨길 수 없는 끌림과 감동이 보여준다.
눈물이 말해준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멋져지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으며,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어진다. 그것을 소유함으로서 또 아름다워지는 거다.
가족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고 건강한 것을 주고싶다. 잔잔한 감동을 주고싶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그 안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세상은 사랑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젠 세상에 사랑이 사라져간다.
잘난자에 대한 질투 그리고 자신보다 못난 자에 대한 혐오만 만연해간다.
털어서 먼지 날만한 누군가는 자신은 익명이란 힘의 뒤에 숨은채 다른 개인에 대한 판단을 맘껏해보라며 자신에게 어떤 권리와 권력이 있는 듯 비난장의 큐레이터가 되기를 자처한다. 다수가 자신의 편이 될거라 생각할수록 더욱 뻔뻔해진다.
세상에서 사랑을 제거하려는 자들. 아름다움을 앗아가려는 자들. 세상이 끝나야 그들도 사라지겠지.